열심히 굴러가는 굴렁쇠
[스크랩] 3인칭 화법에 대하여 본문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지적했듯이 요즘 우리 언어생활에 3인칭 화법이 많이 보인다. 1인칭대명사 ‘나’를 3인칭으로 바꾸어 말하는 방식을 3인칭 화법이라 한다. 사실 3인칭 화법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합리적 판단을 위한 객관화의 방법으로 매우 유효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객관화의 목적이 아닌 경우, 발화의 주체를 흐리고 권위적 목소리를 만들어 사회의 언어 상황을 흐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3인칭 화법은 때로 상황을 객관화해 합리적 판단에 도움을 준다. “네가 내게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면 나는 어떡하라는 말이냐?”라는 말보다 “소풍 행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학생이 교사에게 아무 말도 없이 먼저 가버리면 인솔 책임을 지고 있는 교사로서는 난감할 일 아닌가?”라는 말은 분명 상황을 객관화하는 화법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내는 유효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항시적 화법이 아니고 필요에 의해 잠시 사용되는 방편으로 그쳐야 한다. 만약 습관적으로 늘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여 말한다면 문제가 있다.
외출하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엄마(화자 자신) 오늘 좀 늦을 거야. 아들, 혼자 밥 챙겨 먹을 수 있지?”라고 말하는 경우는 가족이라는 친근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친근화법’으로서, 이도 일종의 습관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친근화법조차도 화자가 청자보다 손위인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친근화법이 쉽게 권위화법으로 둔갑할 수 있는 여지가 여기에 있다.
학교에서 교사들은 학생을 대상으로 자주 3인칭 화법을 쓴다. “선생님(화자 자신)이 준비물 빠짐없이 챙기라고 했지?”라거나 “선생님(화자 자신)이 안 계시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네 마음대로 가면 어떡해?”와 같은 화법이 그것이다. 얼핏 친근화법처럼 보이는 이 어법은 실은 권위를 앞세운 권위화법으로 봐야 한다. 드물지만 간혹 직장이나 군대 등 위계 사회에서도 쓰이곤 하는 이 화법 역시 윗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다. 권위란 그런 것이다.
젊은 연인들이 자주 쓰는 애교화법도 3인칭 화법의 일종이다. “(삐진 표정으로) 선영이(화자의 이름) 지금 화났단 말야”, “오빠(화자 자신)가 미안해. 대신 오늘 오빠가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와 같은 닭살 장면의 경우 ‘선영이’는 명백한 애교화법이며, ‘오빠’는 친근화법을 가장한 권위화법을 의심받을 수도 있겠으나 너그러이 애교화법으로 봐 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애교화법에 대해서는 닭살 운운하며 몸을 움츠리면서도 친근화법이나 권위화법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기실 애교화법은 3인칭 화법을 확산시킨다는 점 외에는 그 폐해가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권위화법에 있다. 권위화법은 무엇보다도 논리적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화법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위화법은 흔히 교육적 언어나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언사로 포장되곤 한다. 많은 학부모들은 교사가 자신들의 자녀와 대화할 때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하는 교사보다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는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는 교사와 대화하는 학생은 논리적 사고가 사실상 중지돼 버린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나 권위는 논리적 반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중반 뉴스에서 늘 듣던 “본인은…”의 위압적인 목소리를 기억해 보라.
권위화법은 상대의 반론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에 발언에 심각한 책임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공손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허풍도 싣게 된다. 80년대 어느 학교의 현관에 있던 글귀, ‘나는 자랑스러운 겨레의 스승, 오늘도 보람과 긍지로 제자 앞에 선다’는 말을 성실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3인칭 화법이 아니지만 이 속의 ‘나’는 결코 1인칭의 자아가 아닌 것이다.
한번도 반론에 부딪혀 보지 못하고 권위 속에서 자란 정체불명의 자아는 이토록 허황한 말을 천연스레 뱉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다양성이 자랄 수 없으며, 발화의 주체가 불분명하므로 말의 책임성 또한 사라지게 된다. 그저 허황되고 관념적인 ‘지당하신 말씀’만 되풀이하는 영혼 없는 녹음기들의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3인칭 화법을 경계해야 하는 궁극적 이유이다.
<서상호 울산중앙고 교사>
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